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5·끝] 하늘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재미한인들, 그들은 영웅이었다

지금까지 연재된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는 일제강점이라는 암흑기에 공군력을 앞세워 독립을 얻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기록이다. 이는 광복을 위해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희생과 헌신을 조국에 바쳤던 재미 한인들의 영웅담이기도 하다. 총 64회에 걸쳐 연재된 이 이야기의 요지를 간략히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 한반도에 드리운 일제의 침략 야욕이 짙어지자 한국인들은 아시아 및 미국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각국의 해외동포 비율에서 한국이 세계 3~6위를 기록하게 되는 이유다. 해외로 떠난 한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군사적 노하우를 얻기 위해 미군·러시아군·영국군 등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들 가운데 미 육군 조종사로 유럽에서 활약하며 156회 출격을 기록한 재미 한인 이응호는 수천 년 한민족 역사가 낳은 최초의 파일럿이 됐다. 1차대전을 지켜본 안창호·윤병구 등 재미 한인 지도자들은 비행기가 향후 전쟁에서 승패를 가늠할 것임에 주목하는 가운데 애국청년들은 미 육·해군 비행학교나 민간비행학교를 통해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현재 국방장관)은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1920년 북가주 윌로우스(Willows) 일원에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했다. 이 비행학교/비행대는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조직이었으며, 벼농사로 거부를 일군 당대의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종림의 재정지원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이 비행학교/비행대는 비행기 10대를 보유하고 연간 200명의 조종사를 배출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1920년 3월 출범했다.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실제로 비행기 3~5대를 보유하고 생도 수십 명을 기숙시키며 훈련시킬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결국 재정문제라는 난관을 넘지 못하고 이듬해 날개를 접었다. 그러나 이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인 박희성·이용근은 1921년 7월 조종사가 됐고 임시정부는 이들을 '비행병 참위(현재 소위)'로 임명, 수천 년 한국사를 통틀어 우리 정부가 임명한 최초의 비행장교가 됐다. 오늘날 한국 공군은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정신에 입각해 이 역사를 수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공군의 법통적 기원이라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1949년 미국으로부터 연락기 10대를 지원받아 출범했다."는 것이 한국 공군의 공식 입장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공군이 역사를 알게 되면서 다시 쓰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 들어가 있는 정도로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은 아니다. 한국 공군은 이 역사를 대내외적으로 확고히 밝히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를 기념하는 조형물(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소요예산 약 18억 원을 국방중기예산계획에 지난해 반영시켰다. 이와 관련,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은 "이 동상의 제막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지난 20일 공군본부에서 필자에게 밝혔다.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극동방송사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사안은 단순히 공군의 기원을 밝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광복군이나 독립군과 오늘날 한국군 전체의 역사적 법통적 연계성과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해주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훨씬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더욱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사안은 군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사 그 자체이며 나아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인사회는 재미한인들의 애국심과 희생과 헌신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한국 공군과 육·해군 항공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 앞으로도 이들의 발전을 위해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재미 한인으로서는 오늘날 미 육·해·공군사관학교나 기타 과정을 거쳐 미군에서 파일럿으로 활약하는 한인들 역시 이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꿈꾸며 하늘로 날아올랐던 애국청년들의 후예라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제 그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오늘 커다란 나무로 자라난 것을 보며 오늘 우리가 뿌리는 작은 씨앗 역시 내일 또 다른 큰 나무로 자라날 것임을 믿으면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를 일구고 그곳에서 하늘을 통해 독립을 얻고자 했던 모든 선구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28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4] 인터뷰: 김창규 전공군참모총장 "임시정부 비행대는 우리공군의 빛나는 역사의 시작"

아래는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와 관련,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과 가진 인터뷰 요지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전쟁을 위해 멀리 미국에서 비행을 배웠던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정신과 의식은 공군은 물론 우리 국군과 국민 모두의 귀감으로 앞으로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일원에 설립했던 비행학교/비행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시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김 전 공군총장(5대)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나 자신도 그동안 이 사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공군의 자랑스러운 뿌리를 자세히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랐고 지금이라도 정확히 알게 돼 다행"이라고 14일 평화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이 사안을 모든 장병에게 교육해 선배들의 선견지명과 정신을 본받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는 전 공군참모총장들 가운데 최선임이다. 김 전 총장은 "우리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비행학교/비행대와 한국 공군의 연계성에는 헌법적 정의가 내려져 있음"에 주목했다. 당시 비행학교/비행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여러 건물이 2개만 현존하고 있으며 그나마 1개는 현재 소유주가 철거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우리 공군의 빛나는 역사가 시작된 이곳을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대위)로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직후인 1948년 후반 채병덕 장군(후에 육군참모총장)과 이종찬 장군이 함께 그의 집으로 찾아와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으로 봉사할 것을 강력히 권유해 국군에 들어갔다. 그는 육군 조병창장으로 조병창의 초석을 다진 후 6.25전쟁 초기인 1950년 가을 공군에 합류, 정전 후에는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대표를 맡기도 하고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공군참모총장(1958-1960)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 육사 졸업과 관련, "일본 육사를 택했을 때는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 같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선유학생들이 훗날 한국군에 기여하기 위해 각각 다른 병과를 택하는 협의를 들으면서 민족정신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평화연구원에서 만난 김 전 총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노신사였으나 사관학교 재학 시절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의 압박을 의논해온 부친의 서신을 받고 "자고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욕은 '성을 갈 놈'이라는 것입니다."는 한 줄 메모를 답신으로 보내 자신을 포함해 그의 집안 모두의 창씨개명을 막았을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23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3] 에피소드: 박희성 유해 봉환②…한국공군 최고 의전으로 박희성 유해 맞아

안중현 한국 국가보훈처 선양국장의 결단으로 박희성의 유해봉환 가능성이 열렸다. 한국 중앙정부 고위 공무원이 자기 입장을 먼저 밝힌 상황에서 자기 견해와 다른 상대방 얘기를 경청해 그 자리에서 상대방 견해를 수용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관례를 거스르는 방향인데다 옆에는 부하직원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실사단은 또 다른 고민이 하나 있었다. 예산 문제였다. ▶안중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금년 국가보훈처 예산에서는 최대 200만 원밖에 배정할 수 없습니다." 봉환 경비로 미화 8,000달러가 있어야 하나, 그해 국가보훈처 예산 항목에서 박희성의 유해 봉환을 위해 쓸 수 있는 예산은 200만원이 한도라는 얘기였다. 다시 말해 봉환 경비 전액을 한국정부 예산으로 충당하려면 빨라도 그 이듬해나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환율을 고려하면 미화 6,000달러 이상이 어디선가 조달돼야 했다. ▶한우성: "보훈처에 200만원 이상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정부 예산에 제약이 있다면 국민이 동참할 수도 있겠죠. 예산 문제에 신경 쓰지 마시고 진행해주십시오." 이로부터 얼마 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의 후원이사회(이사장 홍명기)가 열렸다. 이 연구소는 UC리버사이드에 2010년 설립된 연구소로서, 한국 정부가 미국대학과 재미한인사회와 협력해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국제무대에 세운 동포연구소이다. 이 모임에서 박희성의 유해 봉환과 예산 문제가 거론되자 김영준(Tekmar 대표), 김주연(Costar 대표), 이상영(태평양은행 이사장), 채윤석(Prime Business Credit 대표), 김기준(변호사), 정주성(의사), 홍종화(약사) 등 이사들이 즉석에서 3000달러를 갹출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 남캘리포니아에 있는 한국 공군 출신들 모임인 인터넷공군전우회(ROKAFIS)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도 박희성의 유해 봉환과 예산 문제가 설명되자 이선주 당시 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1000달러를 모금했다. 이렇게 재미한인들이 기부한 4000달러와 국가보훈처가 배정한 200만원을 주요 재원으로 삼고 차액은 유족이 부담한다는 원칙 아래 봉환이 추진됐다. 이해 11월 박희성의 유해가 대전국립현충원으로 봉환되자 한국 공군은 김용홍 공군참모차장(중장)이 공군기를 앞세운 가운데 지휘부와 의장대를 대동하고 박희성의 유해를 맞아들여,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와 박희성이라는 존재가 오늘날 한국 공군의 법통적 역사적 기원임을 대내외적으로 재천명했다. 조종사로서 독립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수천 년 한국사에 걸쳐 정부가 임명한 비행 장교 1호가 된 박희성이 기체 사고로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다 로스앤젤레스 민간인 공동묘지에 잠든 지 73년 만이었다. 지금에 와서 "한국 정부는 박희성의 서거 73년 만에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미국에 있던 유해를 국립묘지로 모셨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게 됐지만, 실제로 이 일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 일을 포함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독립운동사에서 또 국군의 역사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뜻있는 많은 분이 오랫동안 진지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준 덕택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22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2 ] 에피소드: 박희성 유해 봉환①…수천년 한국사에서 공군 1호의 의미

한국 정부는 2010년 광복절을 맞아 박희성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같은 해 11월 15일 박희성의 유해 봉환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당시만 해도 대다수 한국 언론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나 박희성에 대해 몰라 이 유해 봉환식에 대해서도 잘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봉환식은 많은 국민이 잘 모르는 가운데 거행됐다. 여기서는 그 봉환식을 가능하게 했던 에피소드들을 소개함으로써,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와 박희성과 이용근이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에피소드의 요지는 안중현 국가보훈처 선양국장(현재 광주 국가보훈처장)이 이끄는 현지 실사단과 한우성 사이에 있었던 대화다. 이 대화는 LA소재 가든스위트호텔에서 있었다. 한국 정부 실사단은 한국 정부가 박희성의 유해를 즉시 한국으로 봉환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광복절을 앞두고 그가 영면해 있던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있었다. 안중현 국장은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사명감과 국가관이 투철했으며, 대화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지하게 진행됐다. 한우성: "한국 정부가 박희성 지사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건국포장도 추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가보훈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유해 봉환도 곧 이뤄지겠죠?" 안중현: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왜죠?" 안: "비슷한 지역에서 봉환할 유해가 4~5기는 돼야 합니다." 한: "미주에서 4~5기가 되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을 텐데요?"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 "그렇다면 기약할 수 없는 미래 이야기네요?" 안: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봐야죠." 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성문 규정이 있나요?" 안: "없습니다." 한: "그렇다면 관례라는 말씀이시군 요." 안: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주재하시고 자리를 더 빛내실 수 있습니다." 한: "그렇군요. 이해됩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주재하면 언론이 더 관심을 보일 것이고, 언론이 관심을 보일수록 국민에게 홍보도 더 잘돼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효과를 늘릴 수 있다는 말씀이신 모양이군요. 예산 집행의 효율성 문제도 감안해야 할 것이고……." 안: "그렇습니다." 한: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여쭤도 좋겠습니까?" 안: "그렇게 하시죠." 한: "안중근 유해가 확인된다면, 그 경우에도 4~5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나요?" 안: "그 경우는 다릅니다. 단기라도 즉시 봉환해야지요." 한: "역사성이나 인지도도 결정 기준이라고 볼 수 있군요." 안: "맞습니다." 한: "그렇다면 몇 가지만 계속 여쭤보겠습니다. 진정으로 몰라서 여쭙는 것입니다. 혹시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육군 1호'가 누군지 아시나요? 고조선의 어느 군인이겠지만……." 안: "모릅니다." 한: "그러면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해군 1호'가 누군지 아시나요? 이순신 이전에, 최무선 이전에, 고영무 이전에 누군가겠죠? 고구려나 고조선의 누군가일 텐데, 저는 잘 모르는데 국장님이나 이 자리에 계시는 과장님이나 주무관님이나 혹시 아시는 분 있으세요?" 안: "모르겠습니다." 한: "그렇다면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공군 1호'는요? " 대화가 여기 이른 순간 안 국장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질문은 계속됐다. 한: "여기 있지 않나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 박희성. 그가 수천 년 우리 역사를 통틀어 공군 1호임은 부정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아닌가요?" 안: "그렇군요." 한: "안중근 의사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역사성이 뛰어나거나 국민적 인지도가 높거나…… 둘 중 하나만 충족되면 단기 봉환이 가능하다 하셨는데……. 절대 다수 국민은 박희성을 모를 테니 인지도야 제로지만 '수천 년 한국사에서 공군 1호'라면 역사성에서는 완전히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요? 솔직히 지금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본다면 역사성에서는 안중근보다 박희성이 훨씬 더 무거울 수도 있고……." 안: "1기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에 봉환하는 쪽으로 보고하겠습니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21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1] 창군② 임정 출신들 공군창설 주도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으로 1921년 임시정부에 의해 수 천 년 한국사 최초로 한국 정부에 의해 비행장교로 임명된 이용근 역시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일했다. 이용근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문을 닫자 2년 후인 1923년 조선으로 귀국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용근이 비행과 인연을 계속 맺었거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으며, 그의 딸 이은숙(미국 메릴랜드주 거주) 씨도 "아버지는 조종사가 된 후 수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귀국 후 과수원을 일구며 농부로 살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대부였으며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가장 많이 기부한 재미한인이었던 김종림의 경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자식들에게 침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딸의 증언만으로 이용근이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이은숙 씨는 "아버지가 광복 후에 미 군정청에서 일했는데, 아버지가 그 때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30일 병사했다."고 밝히면서 이용근이 해방직후 미 군정청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제시했다. 노정민과 이용근이 모두 미 군정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 기록을 다시 보자. "해방과 더불어…(중략)…군 출신 항공인들은 항공부대 창설을 위해 육군과 미군정 당국에 적극적인 교섭을 벌인 결과 1948년 4월 1일에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함으로써 항공부대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중략)…군 출신이 중심이 된 조선항공기술연맹은 항공인들의 단합을 위해 항공단체 통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46년 8월 서울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초대회장 최용덕)하였다. 동 협회 간부들은 군의 일원으로써 국방의 책무를 담당할 것을 결의하고 항공부대 창설을 위하여 통위부와 미군정 당국에 교섭…(중략)…1948년 5월 15일 통위부 직할부대로 수색에서 조선경비대 제1여단 사령부 내에 항공부대가 창설되고…(중략)…1948년 7월 27일 부대 명칭을 항공기지사령부로 개칭하고…(중략)…1948년 9월 8일 최초로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인수하여…(중략)…육군 항공기지사령부가 동년 9월 13일 육군 항공사령부로 개칭된 후…(중략)…1949년 6월 28일 육군본부에 항공국 설치…(중략)…그 후 김정렬 대령을 비롯한 육군 항공부대 간부들은 공군 창군에 대한 주장을 정계 및 관계부서에 건의한 결과,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 '공군본부 직제'에 의거, 모체인 육군에서 분리되어 공군을 창군하여…(하략)…."(한국 육군항공 60년 발전사, p39-43) 이 기록의 요지는 "해방 후 군 출신 항공인들이 주축이 돼 육군 항공부대를 창설하고, 미군정의 도움으로 비행기 10대를 지원받아 토대를 마련했으며, 여기서 분리돼 공군이 창군됐다."는 것이다. 미군정청 입장에서 보면, 특히 노정민은 미 해군비행학교 출신의 조종사였고 이용근 역시 미국에서 약 8년 살면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 조종사인데다, 둘 다 영어도 능통하고 미국에도 우호적인 인물들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10대를 지원받아 육군 항공부대 또는 공군이 태어나고 발전하는 과정에 미군정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며, 노정민 아들들의 회고는 실제로 그렇게 전개됐다는 증언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20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9] 법통성② 임정 비행학교 / 비행대 관계자 100% 해외한인

대한인국민회·신한민보·흥사단 이들 3개 기관과 청년혈성단은 임시정부 비행학교 / 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라는 토양이 됐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직접 기여한 것으로 확인된 50명에 대한 분석 도표(전회 게재)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보여준다. 우선, 이들 가운데 4명이 미군 출신이고 1명이 영국군 출신이다. 도표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조종사가 돼 독립전쟁에 가려고 했던 애국청년들의 역할모형(role model)이 됐던 이응호 역시 미군이었다. 이들은 군사적 경험을 쌓아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미군이나 영국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거나 또는 임시정부가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하기 전에 미군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을 배운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박낙선, 최자남는 미 육군비행학교, 노정민은 미 해군비행학교, 이도선은 미 육군, 정리용은 영국군 출신이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외국 군복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청년들의 헌신과 희생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이들 가운데 안창호, 김종림, 신광희 등 최소 90%가 대한인국민회 소속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에 안창호가 주도한 애국단체로, 자체 조직과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활용해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최소 90%라는 비율이 상징하듯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탄생 및 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조선정부가 없어진 후 미국에서 한국인의 보호와 관련해 사실상 일정 부분에서는 정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년혈성단이 출범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지도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충성한다."고 표명했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비행학교/비행대가 창설될 때 윤병구 중앙총회장이 비행학교/비행대를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사업으로 하자고 노백린 군무총장에게 제안했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섯째, 이들 가운데 최소 38%가 흥사단원이었다. 흥사단은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주도로 김종림(함경도), 조병옥(충청도) 등 8도 대표를 포함한 25명의 창립위원에 의해 탄생한 애국계몽 및 독립운동 단체다. 임시정부 수립 후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서울에는 수양동맹회, 평양에는 동우구락부를 결성해 국내에서 합법적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두 국내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된 후 동우회로 개칭했다가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됐다. 1948년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으며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임시정부 각료 안창호, 비행가양성사 총재 김종림, 비행학교 감독 곽림대,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 이용근, 대한인비행가구락부 초대회장 한장호 등 최소 19명이 흥사단원이었다. 이와 관련, '새'와 '비행기'를 합친 모습을 심볼로 사용하던 흥사단이 비행학교/비행대의 버팀목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흥사단이 모두 안창호의 비전 위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으며, 이들 3개 기관은 청년혈성단과 더불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라는 토양이 됐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이 독립전쟁과 관련해서도 다시 한 번 돋보이는 대목이다. 여섯째, 이들은 100%가 해외동포였으며,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동휘 국무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98%가 재미동포였다. 이 장면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조선침탈이 가져온 한민족의 대이동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한반도를 벗어나 아시아나 아메리카로 망명을 떠났던 한국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어떠한 희생과 헌신을 바쳤는지도 알게 한다. 오늘날에도 한반도 안팎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이 상호 존중을 깊이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먼저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9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0] 창군(1)…"노정민, 해방 후 공군 창설 참여"

"월남한아버지가 '국군준비대' 에서활동하면서 공군 창설에 관여했으며 '국군준비대' 라고 쓴 완장에는 공군이라고 쓰인것도 봤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이 해방 후 국군 창군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증언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공군, 육군항공부대, 해군항공부대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정신과 역사와 법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이곳 출신이 국군 창군에 직접 기여했음을 뜻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증언의 주인공은 노정민이다.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파일럿이 되기 위해 1919년 미 해군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으며 기고문 '비행세기'를 통해 "한국이 (우선은 독립을 쟁취하고 나아가 해방 후 부국강병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비행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미 해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 합류했던 노정민은 1921년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날개를 접은 후에도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서기로 봉사하는 등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활동했다. 이 무렵 노정민은 조선을 찾아 고향에서 장녀와 장남을 낳았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는 등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재기를 기다리며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했다. 노정민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농장 경영을 마지막으로 약 10년에 걸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29세가 되던 1927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미 해군조종사 출신으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노정민이 조선에 돌아오자 일제는 그를 요시찰인물로 지목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에 따라 다시 찾은 조국에서 그의 생활 또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노정민의 장남 노석풍(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주) 씨는 "일제는 항상 아버지를 감시했다. 정미소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큰아버지가 일본 경찰로 있던 조선인을 매수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얻은 덕택에 아버지가 만주로 피신하기도 했다."면서 "우리들에게 '일본어나 일본역사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일본은 곧 망한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노정민이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에서 그의 행적이 특히 비상한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해방 직후남한에서 있었던 건군과 관련된 활동이다. 노석풍 씨는 "아버지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단신으로 월남해 반도호텔에 있던 미군정청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국군 비행사들을 모아 공군을 조직했다. 여러 사람이 우리 집에 모여 아버지와 함께 공군 창설을 의논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노정민의 차남 노삼풍(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주) 씨는 "월남한 아버지가 '국군준비대'에서 활동하면서 공군 창설에 관여했다. '국군준비대'라고 쓰인 완장을 찬 아버지를 본 기억이 있으며, 이 완장 여러 개가 우리 집에 있었다. 이 완장에 공군이라고 쓰인 것도 봤다. 이 완장을 찬 사람들 여럿이 우리 집에 오곤 했다."고 말했다. 노정민의 두 아들 모두로부터 나온 "아버지가 오늘날 한국 공군 창설에 직접 기여했다."는 증언은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수 십 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이들은 국군 건군 과정에서 육군항공대가 먼저 창설되고 이로부터 공군이 독립한 것을 모르고 있었고, 자신들이 말하는 '공군'이 실제로는 육군항공대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서도 명쾌한 기억이나 지식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 진실한 성품의 소유자인 두 아들의 증언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이 오늘날 한국 공군이나 육군항공대 어느 하나 또는 양자 모두의 출범에 직접 기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정민은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체포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렸다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가족은 청파동 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체포되자 셋집 주인이 '김두봉 재판'을 들먹이며 아버지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그날 밤 전가족이 도주했다."(노삼풍의 증언) 셋집 주인이 들먹여 노정민의 목숨을 구했다는 '김두봉 재판'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두봉에 대해 미군정 하에서 벌어졌던 재판이다. 노정민의 아들들에 따르면, 노정민은 공군 창설 후에는 군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토건업에 종사하다가 1968년 세상을 떠났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8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8] 법통성ⓛ 오늘날 한국공군…임정 비행학교/비행대 법통 계승

첨부 도표는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 참여한 것이 분명히 확인된 인물 50명에 대한 분석이다. 당시 직책, 소속단체, 군경력(비행학교/비행대 이전), 대일전쟁 참전 여부(비행학교/비행대 이후) 등을 기준으로 살펴본 것으로, 이 분석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첫째, 이들 가운데 3명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및 각료다. 이들 세 명은 이동휘(국무총리), 노백린(군무총장), 안창호(노동국총판)으로, 이들 각자는 개인이 아니라 공식적 자격으로 이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기여했다. 이 부분은 - 무엇보다 이 비행학교/비행대가 임시정부 법률 제2호가 정한 군사정책에 뿌리를 두고 창설됐다는 사실 위에서 - 민간조직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군사조직이었음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비행학교/비행대가 민병대가 아니라 정규군이었다는 얘기다. 이 비행학교/비행대의 이 같은 공식적 지위는 오늘날 국군과의 법통적 연계성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하략)…"라고 돼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정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정규군인 국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군의 공군, 육군항공부대, 해군?해병항공부대 모두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부정은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 이들 가운데 지도자 역할을 했던 인물 중의 최소 3명이 조선군 출신이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조선군 참령(오늘날 소령), 군무총장 노백린은 조선군 정령(오늘날 대령), 비행가양성사 재무 신광희가 조선군 하사 출신이다. 이 도표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대한인청년혈성단 발기인으로 청년혈성단을 발족시켜 비행학교/비행대 창설을 위한 토대를 닦았던 이근영 역시 조선군 출신이다. 레드우드비행학교 출신으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 합류한 장병훈은 독립군(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이 같은 사실은 명운을 다해가는 조국을 지키지 못한 통한을 가슴에 새긴 채 중국, 러시아, 미국, 멕시코 등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조선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팎에서 독립전쟁을 위해 다시 힘을 합치고 있었음 보여준다. 일본군의 무력에 눌려 조선군이 해산되고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비운을 참아야했던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신무기로 등장한 비행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었다. 이 부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택하면서 왕정인 조선과 선을 그었기 때문에, 이 비행학교/비행대가 조선군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역사적 계승은 당연할 뿐 아니라 인적으로도 긴밀히 연계돼 있음을 보여준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6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7] 대일전쟁⑥…재미한인들 40~50대에도 앞다퉈 참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확대되면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확산되자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하려고 노력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협력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실체적으로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과 협력하거나 또는 임시정부와 무관하게 재미한인 특수부대를 만들어 대일전쟁에 활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아이플러 소령의 지난 9월 협의에 따라, 김구 주석이 보낸 데이빗 안이 장석윤을 만나기 위해 1942년 11월 28일 캘커타에 도착했다…(중략)…김구 주석은 아이플러 소령의 특수임무에 대해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은밀히 협의했다…(중략)…한국인들은 연합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광복군을 원조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중략)…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에 원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적 인정…(중략)…둘째, 광복군을 전투력 있는 군대로 만들기 위한 내실 있는 원조…(중략)…셋째, 가장 믿을만하고 충성스러운 한국인 첩보요원들이…(중략)…미래의 작전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까지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중략)…일본은 자신의 적들 가운데 한국이 가장 비협조적이며 치명적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은 타당하다."(미국 전략정보국(OSS) 문서, '장석윤 상사의 보고서', 1942년 12월 26일) 7쪽으로 된 이 정보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과 군사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독수리작전은 임시정부와 미국의 협력이 구체화된 실제 사례로 세부적으로는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 2지대와 OSS의 연합작전이었다. OSS는 광복군 2지대와 별도로 조종문, 스탠리 최 등 한국계 미군들도 중국전선에 파견해 독수리작전을 보강했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김종림, 이초, 조종익, 최진하 등은 징집연령을 훨씬 넘긴 4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일전쟁을 위해 미군에 입대했는데, 이들 가운데 이초, 조종익, 최진하는 냅코작전 요원이 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예상보다 일찍 막을 내리자 미국은 즉시 냅코작전도 폐기, 이들은 일선에서 싸울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 동안 여러분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위해 끝없이 일하면서 모든 임무를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중략)…전쟁이 조금만 더 계속됐더라도 우리 요원들은 우리 조직과 훈련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세계에 과시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임무의 세부사항은 공개되지 않을지 모르나…(중략)…작전의 각 단계에서 귀관이 보여준 자발적 열정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애국심은…(하략)…." 이 편지는 OSS 칼 아이플러 대령이 OSS 한인요원 최창수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OSS 요원으로 대일전쟁에 나섰던 한인들의 모습과 이들에 대한 미군 당국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OSS문서, 1945년 11월 9일)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에 관계했던 주요 인물 몇몇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타계했다. 군무총장 노백린은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으로 임정을 이끌다 1926년 서거, 국무총리 이동휘는 사회주의계열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35년 서거,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 박희성은 1937년 서거, 모두가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신한민보 등을 태동시켜 비행학교/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랄 토양을 마련했던 안창호 역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서거했다. 한국 정부는 안창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노백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윤병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77년), 곽림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3년), 이동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95년), 최진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95년), 최능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5년), 신광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1995),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2005년), 박희성에게 건국포장(2011년)을 각각 추서했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5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6] 대일전쟁⑤…재미한인 다수 2차대전에서 활약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들을 포함해 재미한인들도 다수가 미군에 들어가 일본이나 독일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2011년 'msn.com'에 의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 가운데 유색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김영옥 대령일 것이다. 김영옥은 2차대전과 6.25전쟁에 불패신화를 낳은 전쟁영웅인데, 그 역시 대일전쟁에 나섰으나 태평양전선으로 가는 도중에 종전을 맞았다. 2차대전 때 유럽에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미 육군 91사단이 태평양으로 이동배치되기 앞서 그를 스카웃했으나 인사 절차가 진행되던 중 일본이 항복했던 것. 그의 삶은 한국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김영옥중학교'는 미국 역사상 한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최초의 중학교이며, UC리버사이드 부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는 미국 역사상 한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최초의 대학기구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이 진행했던 독수리작전과 냅코작전은 한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작전이었다. "광복군 또는 미군 소속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침투해 대일전쟁을 수행한다."는 큰 그림은 마찬가지였으나, 독수리작전은 광복군-미군 연합작전이었고 냅코작전은 재미한인들을 주축으로 한 미군 단독작전이었다. "1943년 가을 일본-한국과 정보장교는 자격이 충분한 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전선으로 보낼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중략)…11명이 선발됐는데 이들 대부분은 한국어와 영어는 물론 일본어에도 아주 능통하다. 이들 가운데 이미 미군에 복무 중인 일병 1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가 징집연령이 지났음에도 전원이 흔쾌히 미 육군에 입대했다. 전원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들 중 1명을 대위로 임관시키기 위한 진급요청서도 제출됐다. 이들은 기본훈련이 끝나면 태평양 연안으로 보내져 6주간의 OSS 비밀첩보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이 특별훈련은 이들이 극동에 도착하는 즉시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들이 핵심역할을 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신입요원들도 충원하고 훈련해 적지에 침투시키며, 한국 만주 일본에서 중요한 각종 첩보가 수집될 것을 기대한다…(하략)…" (OSS문서, 'Office Memorandum: Recruiting and Training of Korean Intelligence Officers', 극동비밀첩보과 일본중국반 정보장교 대니얼 부캐넌(Daniel C. Buchanan)이 올먼(N. F. Allman) 판사에게 보낸 문서, 1945년 3월 3일) 2차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한 재미한인 가운데는 조셉 리, 프레드 오, 구월도 등도 있다. 조셉 리 중위는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 이영기의 아들로 1944년 8월 유럽에서 전사했다. "조셉 중위는 당년 28세의 꽃다운 청년…(중략)…부모의 조상 나라를 극히 사랑하여 오던 바…(중략)…미국이 참전하니 비행과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비행술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중략)…군의 평생소원이 실제적 전선에 나서서 싸우고자 하는 용감한 기상을 가져 상부에 간구하여 6월 말에 유럽 전선에 나가…(하략)…." 위는 그의 전사 소식을 전한 북미시보 1944월 9월 15일 기사의 요지인데, 참전동기와 함께 조종사로 독립전쟁에 참가하려는 의지가 2대에 걸쳐 이어졌음도 보여준다. 역시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인 프레드 오 대위는 독일군 전투기 6대를 격추시켜 오늘날에도 미군의 에이스 연감에 수록돼 있는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구정섭의 아들인 구월도 소위는 1944년 전선에서 행방불명됐다는 미군 당국의 발표가 있었으나 나중에 생명이 무사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록이 북미시보 1944년 9월 15일자와 10월 1일자에 남아 있다. 구정섭은 공립신보 1907년 12월 20일자에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원으로 나타나는데, 1919년에는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을 지내는 등 국민회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4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5] 대일전쟁④…조종사 조종철은 중일전쟁 터지자 중국전선으로

재미한인 조종사 조종철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과 싸우기 위해 중국전선으로 갔는데 이 정황이 당시 신문에 기록돼 있다.(국민보, 1938년 2월 16일) "북미 국민회의 배경으로 한인비행사 1인을 원동에 파송하였는데, 그 비행사는 조종철씨인데, 원동에 도착한 후에 신한민보사에 보낸 편지가 여좌하니, 이하는 신한민보에 기록된 것을 등재한다.(필자 주: '여좌하니'는 '왼쪽과 같으니'란 뜻으로, 당시 신문이 세로쓰기를 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다.) 청년 조종철군은 당년 25세요, 원적은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일찍이 시카고에 와서 비행기공정학교 라디오전문과를 졸업하여 전쟁의 이기를 쓸 줄 아는 기술을 가진 이로, 중왜대전을 당하여 한국광복의 목적을 가지고 중국항전에 참가를 지원하여 작년 겨울에 시카고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중국으로 보내주기를 청원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중국총영사와 교섭하여 소개를 얻어주고, 아울러 선비를 공급하여,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마닐라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가게 하였다. 그가 떠난 후 중로에서 적의 침해가 있을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 일을 비밀에 부쳐두었고, 또 그를 위하여 염려함을 마지아니하였더니, 그가 12월 24일 홍콩에서 중앙상무부로 보낸 비행우체(필자 주: 항공우편) 특신을 받아본 즉, 그는 무사히 홍콩에 도착하였고 그리로부터 항일전으로 나간다고 하였는데, 그 편지 중 가히 기록할 이야기가 많고 또 그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아는 오늘에 다시 더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음으로써 그 편지를 절략하여 이에 기재하고 아울러 중국신문에도 게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대한인국민회 지도자들이 모여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창설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무렵인 1920년 2월 21일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 지방회가 선출한 임원 명단에 학무원 조종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신한민보, 1920년 3월 12일, 윌로우스 지방회 보고) 이 둘이 동일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 아직 불확실하나, 만약 동일인물이라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조종사로서 대일전쟁에 참전한 인물을 배출했음을 의미한다. 국민보 1938년 2월 16일자에는 조종철이 당시 25세라고 돼 있기 때문에 1920년에는 7세 소년이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나이에 국민회 임원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명이인이겠으나, 만약 국민보가 35세인 조종철의 나이를 25세라고 잘못 썼다면 동인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동일인물이든 아니든, 조종철의 경우는 항공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임시정부 비행대/비행학교가 탄생하는 토양을 일궜던 대한인국민회가 대일전쟁 기회가 주어지자 중국 정부와 협력하는 가운데 경비까지 대면서 한국인 조종사를 대일전쟁에 파견한 실제 사례이기도 하다. 국민보 기사에 등장하는 '중왜대전'은 중일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1937년 7월 일본군이 일으킨 소위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일본은 이해 12월 그 연장선에서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중일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으로 확산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됐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3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4] 대일전쟁③ 김종림 3부자 대일전쟁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탄생의 일등공신으로 이곳 총재까지 지낸 김종림은 미ㆍ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환갑을 눈앞에 둔 58세 때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이 됐다. 미국의 주방위군은 기본적 임무가 각주의 방어이나 전시가 되면 연방군으로 선발돼 일선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김종림이 전시에 주방위군이 됐다는 사실은 언제라도 일선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김종림의 두 아들도 모두 미 해군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했으니, 3부자 모두 군인이 돼 일본과 싸운 셈이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존재하던 시기를 전후한 수년 동안 대한인국민회 총무 및 회장으로 비행학교/비행대의 탄생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최진하(1889-?)도 2차대전이 터지자 OSS요원이 됐고, 그의 아들은 미 해군에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최진하는 평양 출생으로 숭실대학을 나와 조선에서 교사와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1916년 도미했다. 그는 조선에서 평양 광성학교 교사(1906-1908), 전주 신흥학원 교사(1909-1913)를 역임하고 전주에서 3년 동안 신학교에 다니며 교회전도사(1914-1916)를 지냈던 지식층이었다.(흥사단 제73단우인 최진하의 흥사단 이력서, 1917년) 최진하는 1926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장으로도 활동했으며, 후에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 제3행서 재무위원으로도 활약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1936년 11월 27일) 그는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한 언론인이기도 한데, 그가 192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국민회를 이끌 때 부회장이 황사선이었다. 황사선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탄생에 직접 기여한 항일결사단체 '대한인청년혈성단'의 초대 단장이었다. 최진하는 1923, 1924, 1936년 국민회 총회장으로 재선임되는 등 이후에도 줄곧 국민회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1936년 경우를 보면 총회장이 최진하, 재무가 이초, 학무가 황사선이었다. OSS는 이미 1944년말부터 최진하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OSS문서, 'Personnel', 1944년 11월 4일), 결국 그는 냅코작전(NAPKO Project)을 위해 1945년 5월 OSS 요원으로 선발됐다. OSS는 최진하를 영입할 때부터 그를 극동지역 현지작전부대에 배치할 계획이었다.(OSS문서, 'Engagement Sheet', 1945.6.8-14) OSS는 당시 최진하에 대해 "현재 55세로 동기부여가 확실하고 팀플레이에 능하며, 정신적으로 대단히 안정돼 있다. 성격도 좋고 대인관계가 매우 원만한 인물로, 나이에 비해 체력도 좋으며 신체적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교관으로 적임."이라고 평가했다.(OSS문서, 'Station's Report', 1945년 6월 10일) 최진하는 극동파견을 목적으로 OSS 로스앤젤레스 지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일단 중국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OSS문서, 'For China FEU'. 1945년 9월 17일 이후 작성)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OSS는 불과 3일 만에 한인요원 가운데 먼저 최진하 등 5명과 OSS 사이의 관계를 정리했다.(OSS문서, 'Contract Termination of FEU Employees', 1945년 8월 18일.) 1945년 9월 17일 또는 그 후 작성된 OSS 수기 메모에는 최진하와 OSS의 관계가 1945년 8월 18일 종료됐으며, 그 해 9월 17일까지 급여가 지불됐다고 돼 있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11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2] 대일전쟁①…임정 비행학교 출신 다수 2차대전 참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1921년 날개를 접은 후에도 이곳 출신 조종사나 관계자들은 임시정부 요인으로 또는 민간인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도 하고 직접 대일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대일전쟁과 관련해 그나마 정확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확인되는 인물이 이초이다. 레드우드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비행교관까지 지냈던 이초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대일전쟁에 나설 기회를 갖게 됐다. 이초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다가 진주만 기습 1주년이 되는 1942년 12월 7일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요원이 됐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발족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실상 전신이다. 이 무렵 이후 이초에 대한 미군 기록은 1945년 1월 OSS 문서에 다시 등장한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초의 당시 신분은 민간인으로 OSS가 한반도에서 비밀첩보 임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 이초를 미군에 입대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른 OSS 문건은 "OSS가 대일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정보 수집을 위해 이초를 한국으로 파견될 예정인데, 통상적 입대절차를 따르면 정보가 누설될 위험이 있으므로 통상적 절차를 생략하고 워싱턴DC 모병소에서 선서만 하게 한 후 OSS로 직접 출두하도록 해주면 다음은 OSS가 알아서 조치할 것"이라는 요지로 쓰고 있다.(1945년 1월 6일자) 한 때 폐결핵을 앓기도 했던 이초는 이 무렵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돈도 잘 벌고 있었으나 미군의 요청을 받고 대일전쟁에 참전할 기회가 주어지자 4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미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입대 이후의 이초에 대해서는 OSS 시절 현지작전부대(FEU: Field Experimental Unit) 부부대장으로서 그의 상관이었던 플로이드 프레이지이 소령이 이초를 중사에서 상사로 특진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초는 1945년 1월 11일 미 육군에 입대했고 바로 다음날 OSS로 배속돼 4개월간 특수훈련을 받았다. OSS 훈련의 목적은 적지의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요원들을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이초는 확고한 용기와 뛰어난 리더십을 반복적으로 보였다. 이초는 그 사이 중사로 진급했다. 이초는 현재 현지작전조 1개의 조장을 맡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에게 그런 역할을 맡길 계획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육 기간 중 그가 보여준 능력에 따라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 이초는 한국어와 영어에 아주 능통하며 중국어와 일본어도 꽤 잘한다. 그는 인품과 나이 덕택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영향력도 크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초는 나이에 불구하고 체력도 매우 뛰어나 젊은 대원들에 비해 체력이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보다 우수함을 여러 번 보여줬다. 이초는 애국심 때문에 수익이 높은 사업도 놔두고 이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현재 이초가 속한 작전조를 편성할 때는 실제로 누구를 조장으로 삼을지 미정이었으나, 훈련 과정을 통해 드러난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인 결론은 이초가 조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초가 속한 작전조에는 하사 1명과 중사 1명이 더 있다. 아이플러(Eifler) 대령은 작전조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이초를 상사로 진급시켜 조장에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서는 이초가 이등병으로 입대한지 두 달도 채 안된 1945년 3월 2일 중사(Staff Sergeant)로 진급, 미군 당국이 이초에 대해 이미 대단히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OSS 당국은 문서로 제출된 이 건의를 받아들여 1945년 7월 1일 이초를 상사로 진급시키고 이초를 비롯한 한인들을 한반도에 투입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이 유명한 '냅코작전'(Napko Project 또는 Napko Plan)'의 한 단면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9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1] 날개를 접다 ②…오늘날 한국 공군의 모태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이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창설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1921년 역사 속으로 날개를 접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최대의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의 비즈니스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종림이 1920년 10월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폭풍우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에도 같은 규모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상식을 뛰어넘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독립이라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던 김종림,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으로서 불굴의 투지를 갖고 있던 지도자 노백린 등이 이 시점에서 비행학교/비행대에 대한 꿈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김종림이 총재로 있던 '비행가양성사'는 1921년 4월 폐쇄됐으나 임시정부는 1921년 7월 '비행가양성소' 출신으로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획득한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명하면서 비행대 양성에 대한 의지를 견지했다. 임시정부가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킨 것은 단순히 그들의 희생과 노고를 치하하는 상징적 조치가 아니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비행대 양성이라는 임시정부의 계획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비행가양성사가 폐쇄된 이후이며 임시정부가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기 직전인 1921년 초여름에도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ly Journal)은 1921년 6월 1일자에서 "퀸트에 있던 한국인 비행장을 다시 열기 위해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언급이 오늘 있었다."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역시 1921년 5월 19일, 5월 26일, 6월 9일, 8월 25일자를 통해 비행학생 지원을 위한 재미동포 기부자 명단을 계속 게재, 재미동포사회의 지속적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신한민보는 당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정신적 지주였으며, 독립전쟁에 있어서도 공군력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이 비행학교/비행대의 탄생과 유지에 사실상 모태가 됐던 언론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를 위한 최대의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은 1921년 들어서도 한 해전 폭풍우로 입었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종림은 이후 쌀농사를 포기하고 서비스 업종을 주로 하는 윤년식산회사, 농산물 유통업체인 리들리 건제회사, 북부인흥정농민사, 간장업체인 중미식물회사를 운영하는 등 끊임없이 재기를 시도했지만 그의 비즈니스는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도미 10여년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를 헤치며 쌀농사로 거부를 일궈 '백미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김종림으로서는 쉽지 않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김종림의 사업이 휘청거리면서 최대의 재정후원자를 잃은 비행학교/비행대 역시 다시 날개를 펴지 못했고 이와 함께 임시정부의 공군 양성 계획도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 비행학교/비행대 관계자들은 훗날 독자적으로 미군이나 중국군으로 대일전쟁에 참전하거나 민간인으로 또는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홍윤정 박사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이후에도 독자적 비행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 조례를 공포해 공군을 창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5년 3월 미국과 공조해 한국공군 창설 계획을 수립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불발됐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줄기찬 공군 창설 노력과 정신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돼 오늘날 한국 공군의 모태가 됐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8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0] 날개를 접다 ①…재정위기 맞아 1921년 역사 속으로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이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창설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는 최대의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의 쌀농사가 1920년 10월 폭풍우의 타격을 이듬해에도 회복하지 못하면서 1921년 날개를 접었다. 당시 상황은 비행가양성사 총재 김종림의 청원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이 청원서는 위기에 처한 비행학교/비행대를 도울 것을 촉구하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최진하의 '비행학생 도웁시다'라는 권고문에 소개돼 있다. "청원서: 본사는 작년 여러분의 성력을 많이 입어 오늘날까지 몇몇 인원 등을 양성하여 온 결과로 본월 10일에 수인이 정부면허장을 수득키 위하여 1푼의 세금을 요구치 아니하는 백인동정자의 비행기로 시험하다가 불행히 300척 고에서 떨어져 기계수는 지어 사경하여 병원에 들어가 현금 해부치료 중에 있사옵고 백인의 비행기는 전부 파상되어 일개 폐물이 되었으며 본사 소유 기계도 역시 백원(?) 용으로 중수하기 전에는 사용키 불능하게 된 사실이외다. 이제 몇 개 조건중 제1은 이미 파상한 기관수는 고명한 의사의 치료로 조속히 회복되기를 바라오며 제2는 우리 민족에게 극히 동정하는 백인의 비행기 파상한 데 대하여는 만분의 1이라도 어떻게 구쳐되기를(?) 바라오며…(중략)…본사의 비행사업은 수년 이래로 공사간에 허다한 시간과 재정을 희생하였고 또한 허다한 위기를 경과하여…(중략)…소위 성취의 좋은 결과를 얻을만한 지경에 본사는 목하에 지진역진하여 성취급 계속하는 문제에 할 수 없이 중도에 폐하게 되었음에 진실로 눈물을 뿌리며 슬픔을 익히지 못하겠음으로…(하략)…."(신한민보, 1921년 5월 5일) 이 청원서는 김종림이 1921년 4월 10일 박희성이 이용근, 정몽룡과 함께 레드우드시티에 있던 미국 민간비행학교에서 첫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기체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은 것과 관련, 그 때 비행기를 빌려줬던 백인에 대한 보상 등을 위해 재미한인사회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보낸 것이다. 그 비행기는 백인 소유주가 박희성 등 한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높이 사 무상으로 빌려줬던 것으로, 김종림의 청원서에 등장하는 기계수 또는 기관수는 박희성이다. 김종림은 이 청원서를 통해 한 해 전 설립된 비행가양성사의 해체를 알리고 있다. 한국 학계 일각은 이 문건에 입각, 비행학교의 폐교 시점을 이 때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문건에 등장하는 해체의 대상은 '비행가양성소'(=비행학교)가 아니라 '비행가양성사'이다. 비행가양성사는 비행학교가 설립된 후 급속히 자리를 잡아가자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이 비행학교/비행대를 지원하고 이끌기 위해 출범시킨 조직이었다. 비행가양성사와 비행가양성소라는 두 조직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인 것은 사실이나, 양자의 차이를 주목해야 임시정부의 의지와 계획이라는 면에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1920년 비행학교의 태동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요소와 1921년 비행가양성사가 폐쇄될 때 이 비행학교/비행대를 둘러싼 모든 요소 가운데 달라진 것은 비행학교/비행대 재정을 도맡다시피 했던 김종림의 재정상태 하나였다. 신한민보는 1921년 가을 북가주 순행기에서 "10월 16일 김종림씨 댁에 당도하니 이는 광대하고 청결한 양옥인데 방안제구가 과연 부자의 집이라 할 만하고 또한 말과 뜰이 광활한데 이는 세집이 아니고"라면서 그의 농원에 대해서도 "10월 18일 김종림씨의 농원에 당도하니 망망하고 가히 없는 3,300 에이커의 광대한 농원"이라고 썼다.(신한민보, 1921년 10월 27일)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7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9] 한국사 최초의 비행장교 이용근…임정, 1921년7월18일 '비행병 참뮈'로 임명

이용근(1894~1950) 역시 1921년 7월 18일 임시정부에 의해 박희성과 함께 '비행병 참위'로 임명됨으로써, 수천 년 한국사에 걸쳐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비행장교 1호'가 된 인물이다. 참위는 오늘날 소위에 해당되는 조선군 계급으로 한국사에는 '비행장교 1호'가 두 명 있는 셈이다. 임정은 이용근과 박희성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면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포상금도 주기로 결정했다. 두 조종사에 대한 임시정부의 공식 임관 및 포상 명령은 임시정부 공보 1921년 7월 20일자에 게재돼 있다. 이용근은 평남 출신으로 숭실중학과 평양 관립일어학교를 마친 후 조선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지식층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미국으로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디뎠는데 잠시 후 대한인국민회에 가입,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흥사단에 가입한 이용근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장병훈, 이용선 등과 함께 청년혈성단을 조직했다. 장병훈?이용선과는 중국선박 오션차이나(Ocean China) 호를 타고 태평양을 함께 건넌 사이였다. 이용근이 군사적 독립운동의 기치를 내건 청년혈성단을 결성하던 1919년 5월 조선에 있던 그의 피붙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이용근 씨의 백부는 70노인으로 본래 교회에 열심히 종사하는 인물이며 백부와 숙부와 중형이 다 독립운동에 참여됨으로 5월초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악형을 당하는 중 그 사생존망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하니…(하략)…."(신한민보, 1919년 10월 2일) 이로부터 몇 달 후 이용근은 독립전쟁을 위해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 민간비행학교인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25세가 되던 해였다. 이곳에서 이용선, 이초, 장병훈, 최자남, 한장호 등 한인청년들과 비행훈련에 열중하던 이용근은 이듬해 2월 이곳을 답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을 만나 그의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창설 결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날 노백린 군무총장과 이용근 등 한인청년 파일럿 지망생 6명은 모두 모자에서 신발에 이르기까지 완벽히 비행복을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는데 이 사진은 1920년 4월 27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돼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줬다. 이용근이 레드우드비행학교를 졸업하던 모습 또한 당시 신문에 잘 기록돼 있다. "레드우드시티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천신만고의 침로를 익혀가면서 공부하던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씨는 금월 17일에 비행술을 졸업하였는데 그 3씨의 인내력과 결심을 누가 아니 흠모하리만은 그들의 애국심은 가히 배울만하도다. 생각건대 그들은 우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원수 왜국을 소멸하는 데는 비행술이 아니면 능치 못하리라 하는 굳은 결심을 가졌도다. 우리 일반이 희망하는 것도 이에서 지나지 아니하도다. 3씨의 목적하고 결심한 바를 성공할진저."(신한민보, 1920년 6월 22일) 레드우드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용근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 합류했다. 수개월 후 이곳의 최대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 선생의 농장이 폭풍우로 타격을 입고 비행학교/비행대가 휘청거리자, 이용근은 새크라멘토에 있던 미국 민간비행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원래 이용근은 박희성이 기체사고가 나던 1921년 4월 박희성에 이어 시험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박희성의 사고로 기체가 대파돼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가 다음 달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박희성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를 때 같이 응시해 합격했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6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6] 한국사 최초의 비행장교 박희성…①연희전문 재학중 독립전쟁위해 도미

김종림의 농장이 폭풍우로 직격탄을 맞아 어려워지자 비행학교/비행대도 급격히 재정이 곤란해지면서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곳에서 비행을 배우던 한인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던 길은 조종사가 돼 독립전쟁에 가기 위해 미국인 민간비행학교에서 비행을 계속 배우거나 아니면 조종석을 떠나는 것이었다. 몇 달 후 임시정부가 비행장교로 공식적으로 임명함으로써 수천 년 한국사가 낳은 '비행장교 1호'로 탄생하는 박희성과 이용근은 위 두 가지 선택에서 전자를 택한 인물들이다. 박희성(1896-1937)은 1896년 5월 8일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과 변루 부부의 4남2녀 가운데 삼남으로 태어났다. "박희성은 둘째 형이 다니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에 들어가 축구부 주장을 지냈다. 그 때 둘째 형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을 준비하라'고 해서 미국으로 와,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다녔다." 이 말은 박희성의 유족의 증언으로 이 증언에 등장하는 둘째 형이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대표였던 박희도이다. (증언 유족은 미국 뉴저지주에 살고 있는 박희도의 아들 박승두, 그의 아들 박홍남, 박홍남의 처 하이디 박) 박희성이 정확히 언제 조선을 떠나 미국에 도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그의 미국 도착연도는 1918년이다. 이 자료는 'Fourteenth Census of the United States: 1920-Population, Supervisor's District No. 3, Enumeration District No. 125, Sheet 2 B'로 1920년 1월 2일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났다는 사실과 당시 조선에서 미국 본토까지 가기 위해서는 약 2개월 이상 소요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희성은 1917년 말에 조선을 떠나 1918년 초에 미국에 도착했거나 또는 늦어도 1918년 10월말 전에는 조선을 떠나 같은 해 미국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박희성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일 때 조선을 떠났다는 얘기다. 한민족 최초의 파일럿 이응호가 조종사로 세계대전에 참전해 군사적 노하우를 체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훗날 독립전쟁에 가세하려고 미군 파일럿이 됐듯, 박희성도 똑같은 길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그 시절 연희전문학교 축구부 주장이라면 조선 최고의 지성과 체력을 겸비했던 청년학도였던 셈인데, 앞서 인용한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자료는 박희성이 읽기, 말하기, 쓰기 3개 부문 모두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기록해 그가 조선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미국에 갔음을 보여준다. 이 인구조사자료에는 박희성의 직업이 정비사로 돼 있어, 그가 미국에 간 후 조종사가 되기 위해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인 최초의 조종사로 알고 있던 안창남 역시 일본에서 정비를 먼저 배운 후 조종사가 됐다. 박희성은 1920년 3월 임시정부 비행학교가 개교하자마자 정몽룡?조종익 등 다른 한인청년 23명과 함께 이곳에 들어갔다.(신한민보, 1920년 3월 19일) 임시정부가 박희성을 조종사로 만들기 위해 이 학교에 파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희성은 1918년 미국에 입국했고, 임시정부는 3.1운동 후인 1919년에 수립됐기 때문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2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5] 위기-김종림 농장 피해로 비행학교 '휘청'

비행학교는 7월 공식개교식도 갖고 자체적으로 보유한 훈련기도 늘리면서 시스템도 정비하는 등 급속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나, 이 비행학교/비행대에 대한 최대 재정후원자인 김종림의 농장이 이해 10월 폭풍우로 결정적 타격을 입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당시 현지 신문 '글렌 트랜스크립트'(Glenn Transcript)는 "불행히도 지난주 폭풍우로 '김 앤 포터'(Kim and Porter)가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은 (잘 영글어 이삭이) 무거운 벼가 1700에이커나 되는데 벼들이 절망적으로 넘어졌다. 이 때문에 전량을 인력으로 수확해야 한다. 이들은 어제 이곳에 와 계약을 체결하고 힌두인 200명을 고용했는데 일인당 인건비가 하루 4달러에 숙식도 제공해야 한다. 기계 수확이 1에이커에 10달러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회사가 폭풍우로 입은 타격은 쉽게 짐작될 것"이라고 보도했다.(글렌 트랜스크립트, 1920년 10월 13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김 앤 포터'는 김종림이 쌀농사를 위해 설립했던 업체 이름으로 '포터'(Porter)는 김종림의 미국인 동업자의 성이다. 김종림이 이처럼 미국인과 동업시스템을 구축했던 이유는 아시아계 이민자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계의 토지 소유를 막았던 당시 미국의 부동산제도 때문이다. 김종림은 한국 학계 일각의 주장처럼 11~12월 발생한 폭우와 홍수로 직접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라 10월 3~9일 주간 폭풍우로 인해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이 폭풍우로 벼가 너무 누워 기계 추수가 불가능해져 손으로 추수를 해야 했으며 이로 인한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컸을 뿐 아니라 이후 기온도 예년보다 낮아 추수가 계속 연기되면서 부담이 가중됐다.(글렌 트랜스크립트, 1920년 12월 4일) 김종림이 1920년 한 해에 비행학교 지원을 위해 내놓는 현금만 5만달러 안팎으로 보이니 비행학교/비행대가 직접적 영향을 받고 휘청거린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당시 신한민보는 강영소의 '북가주순행기'라는 제하의 논설을 통해 1920년 8월 5일 현재 김종림 농장의 모습을 "김종림씨의 농원에 당도하니 망망 무제한 평원광야의 3000여 에이커의 넓은 들이 마치 청색의 비단 자리를 깐듯하여 관람자에게 무쌍한 유쾌를 공급하더라."면서 "김씨 농원에 32명의 동포가 동류하고 비행기 학교에 16명의 학생이 기숙하는데…(중략)…8월 6일 이른 아침에 일찍이 비행기 연습장에 나가서 비행기 연습을 관광하고…(하략)…"라고 쓰고 있다.(신한민보, 1920년 8월 26일) 김종림의 막내아들 김두원 씨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선친이 이 해 농사만 마치고 은퇴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니가 생전에 전했다"고 밝혔다. 이 증언은 김종림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난 것으로 보고 쌀농사에서 곧 손을 뗄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통상 10월 첫째 주부터 쌀 수확을 시작하므로 김종림의 농장이 1920년 10월 둘째 주에 발생한 폭풍우에 며칠만이라도 앞서 수확에 착수해 그 엄청난 부를 지켰다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미래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비행학교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농장의 재미한인들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남에 따라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캘리포니아 재미한인사회의 무게 중심은 사업적으로도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어가면서 지리적으로도 윌로우스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남부로 움직였다.(신한민보, 1923년 6월 14일, 1924년 4월 3일)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5-01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4] 1920년대 비행대 설립 직후…일본의 반응

1919년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920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위해 미국에 설립한 비행학교/비행대가 급속히 체계를 잡아가자 일본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본은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 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 수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 '구미재류 주의선인명부 송부의 건'(문서번호: 고경 제5429호, 발송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수신자: 외무차관)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문서번호: 비 제33호, 고경 제9189호,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내각총리대신) 등을 통해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다.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학무총장(현 교과부장관) 김규식의 활동에 대한 정보로부터 시작되는 20쪽 분량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라는 제목으로 3쪽에 걸쳐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문제를 다루고, 이어서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북부 재미동포사회의 군사적 독립운동 동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정보보고서의 비행학교/비행대 관련 요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는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제1회 졸업생은 우병옥·오림하·이용식·이초 등 4명이며,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것이다.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 관계자들을 포함해 서구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각 인물을 중심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문건이고,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에서는 이 비행학교를 '호국독립군 비행기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의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비행대의 전체적 윤곽과 관계 인물에서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정보가 취합돼 있어 일본 당국이 큰 틀에서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됐으나, 개교식 날짜, 노백린 직함, 졸업생 이름 등 여러 면에서 사실과 조금씩 차이가 있어 정보의 정확성 자체는 다소 떨어졌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4-30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3] 군사력으로서 당시 항공의 현주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1920년에 비행학교/비행대 창설했다는 사실은 당시 세계적 상황에 비춰볼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비행기를 발명한 국가로서 오늘날에도 세계를 이끄는 항공우주 선진국이자 세계 최고의 공군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783년 프랑스는 수소를 이용한 기구 비행을 성공시킴으로써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류의 염원이 현실화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동력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발명해 인류문명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프랑스가 기구비행에 성공한 지 120년이 지난 후였다. ▶1908년 라이트 형제는 미군을 위한 시범비행에 성공했다. ▶1909년 미군은 라이트 형제로부터 '육군 1호기'(Army Aeroplane No. 1)를 구입해 군사력으로써 활용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10년 유진 플라이(Eugene Fly)는 미국 군함 '브리밍험(Brimingham)' 호에서 출격에 성공해 항공모함 시대를 예고하는 전주곡을 울렸으나 미군은 항공력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버리지 못했다. ▶1913년 미국 의회는 미 육군 안에 항공부서를 설치할 것을 규정하는 법을 제정, 육군은 항공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17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그때까지 미국이 제조한 항공기를 전부 합쳐도 1,000대도 못 미쳤다. 미 육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대체로 군용기들을 통신대 소속으로 편제하고 통신대의 지휘통제를 받도록 했다. ▶1918년 미 육군은 항공대를 통신대로부터 분리하면서 'Air Service'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1919년 비행대 창설을 법으로 정하고 그 이듬해 정부차원에서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실로 선구자적 통찰력을 내포한 것이었다. ▶1920년 미군은 3만3,143피트 고공비행을 성공시켰다. ▶1923년 미군 조종사 2명이 북미대륙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1924년 미군기 4대가 최초로 세계일주 비행에 성공했다. ▶1926년 미국은 육군 항공대 창설법을 제정하면서 'Air Corps'란 용어를 사용했다. ▶1941년 미국은 육군 안에 육공군(Army Air Force)을 만들었다. ▶1947년 미국은 비로소 공군(Air Force)란 이름으로 독립적 편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발명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의 군사적 활용에서는 다소 뒷북을 쳤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공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해 비행기의 군사적 활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던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공군력의 중요성을 입증했음에도 불구,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열강들은 공군력의 실효성에 대한 논쟁을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공권을 장악하지 않고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미국은 종전 2년 후에야 공군을 독립시켰다. 비행기는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아 항공은 실전은 말할 것도 없고 훈련 자체도 매우 위험했다. 1917년 영국군의 경우를 보면 초급 비행훈련 과정에서 90명 중 1명, 중급 비행훈련 과정에서 50명 중 1명, 고급 비행훈련 과정에서 9명 중 1명이 각각 사망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으로 공군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한 영국은 공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영국 공군은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병력 29만1170명과 항공기 22,647대를 보유한 세계 최고의 군대가 돼 있었다. 이같은 항공의 위험성은 그 시절 조국 독립을 위해 조종사가 되려 했던 당시 한인 애국청년들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는지도 엿보게 한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2014-04-29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